4편: 굳어버린 활자를 깨우다: 세척제와 솔을 이용한 타자기 내부 찌든 기름때 제거
타자기를 들여와 신나게 타이핑을 하다 보면 유독 특정 글자가 선명하게 찍히지 않고 뭉개져 보이는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글의 'ㅇ'이나 'ㅁ', 영문의 'o', 'e', 'a'처럼 안쪽에 빈 공간이 있어야 하는 글자들이 마치 까만 점을 찍은 것처럼 꽉 채워져 나오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타자기의 결함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종이에서 나온 미세한 종이 먼지와 섬유질, 그리고 리본에서 묻어난 액체 잉크가 끈적하게 엉겨 붙어 활자의 홈을 메워버렸기 때문입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타자기 건반을 눌렀을 때 활대(Typebar)가 종이까지 날아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서기도 합니다.
제 첫 타자기도 그랬습니다. 건반이 뻑뻑해서 잘 움직이지 않자, 당시 저는 무작정 윤활유를 잔뜩 뿌려주었습니다. 처음 몇 분은 부드럽게 움직이는 듯했으나, 며칠 뒤 기름이 먼지와 결합해 엿가락처럼 끈적한 녹색 진흙으로 변하면서 기계가 완전히 굳어버렸습니다. 수동 타자기 관리의 철칙은 '기름을 치는 것'이 아니라, '찌든 기름때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오늘 글에서는 활자와 구동부를 안전하고 말끔하게 세척하는 실전 정비 노하우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타자기 세척의 절대 금기: WD-40을 피해야 하는 이유
기계가 잘 움직이지 않을 때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방청윤활제인 'WD-40'을 집어 듭니다. 일시적으로는 굳은 부위가 풀려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자기와 같은 정밀 기계식 장치에 WD-40을 뿌리는 것은 시한폭탄을 장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WD-40은 윤활유라기보다는 방청제(녹 방지제)이자 세척제에 가깝습니다. 액체가 증발하면서 표면에 끈적한 방청 막을 남기는데, 이 막이 공기 중의 엄청난 먼지를 자석처럼 끌어당깁니다. 수동 타자기는 기어 마찰 부위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유분 없이 '금속과 금속의 순수한 마찰'로만 구동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특히 활대들이 모여 있는 부채꼴 모양의 '세그먼트(Segment)' 슬롯에 기름이 들어가면, 먼지가 엉겨 붙어 얼마 못 가 활대가 뻑뻑하게 완전히 멈추게 됩니다. 타자기 청소의 핵심은 기름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기름과 오염을 '완전히 날려 보내는 탈지(Degreasing)' 작업입니다.
안전하고 확실한 타자기 전용 세척제 종류
타자기를 세척할 때는 플라스틱이나 도색 면에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 기름때를 신속하게 녹이고 잔여물 없이 증발하는 휘발성 세척제를 사용해야 합니다. 약국과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두 가지를 추천합니다.
지포(Zippo) 라이터 기름 (나프타 성분) 클래식 타자기 수집가와 복원 전문가들이 가장 애용하는 최고의 세척제입니다. 라이터 기름의 주요 성분인 나프타(Naphtha)는 수십 년 묵은 굳은 구리스와 타르, 먼지 덩어리를 아주 빠르게 분해합니다. 게다가 금속에 닿아도 부식을 일으키지 않으며, 먼지를 털어내고 나면 잔여물을 전혀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휘발됩니다.
이소프로필 알코올 (IPA 90% 이상) 약국에서 판매하는 소독용 에탄올보다 순도가 높은 이소프로필 알코올은 세정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다만, 알코올 성분은 70년대 이후 생산된 일부 플라스틱 바디 타자기의 플라스틱을 허옇게 녹이거나 외관 도색을 변색시킬 위험이 있으므로, 외관 프레임에 닿지 않게 주의하며 금속 부품(활자 머리, 세그먼트)에만 국소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뭉개진 활자와 뻑뻑한 활대 세척 4단계 루틴
세척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작업 공간 바닥에 반드시 신문지나 두꺼운 박스를 넉넉히 깔아주세요. 기름때가 녹아내리면서 검은 국물이 떨어지기 때문에 바닥이 오염될 수 있습니다. 또한, 휘발성 물질을 다루므로 창문을 열어 환기 환경을 확보해 주세요.
1단계: 준비물 챙기기
라이터 기름 또는 이소프로필 알코올
못 쓰는 빳빳한 칫솔 (또는 다이소표 황동 솔/스틸 솔)
핀셋 또는 이쑤시개, 미술용 얇은 붓
키친타월 및 면봉
2단계: 활자 머리 홈 파내기 (이물질 제거) 글자가 찍히는 활자 머리(Typeface)를 자세히 보면 'ㅇ'이나 'ㅂ' 내부 홈에 까맣게 굳은 돌 같은 먼지 덩어리가 박혀 있습니다. 칫솔에 라이터 기름을 살짝 묻힌 뒤, 활자 머리를 위아래로 강하게 쓸어내리며 솔질을 해줍니다. 찌든 때가 불어날 때까지 1~2분 기다린 후, 이쑤시개 끝이나 핀셋 끝을 이용해 글자 틈새에 박힌 단단한 이물질을 조심스럽게 파내어 줍니다. 이 작업을 마치고 나면 글씨가 몰라보게 날카롭고 선명하게 찍힙니다.
3단계: 활대 슬롯(세그먼트) 청소하기 자판을 누르면 움직이는 부채꼴 모양의 금속 틈새(세그먼트)가 청소의 핵심 구역입니다. 얇은 붓이나 주사기를 이용해 라이터 기름을 세그먼트 슬롯 틈새에 조금씩 흘려보냅니다. 그런 다음, 굳어 있던 자판을 수차례 연속해서 탁탁 쳐봅니다. 기름이 틈새로 스며들면서 내부에 갇혀 있던 시커먼 찌든 기름때와 먼지가 밖으로 베어 나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시커먼 국물을 키친타월과 면봉으로 즉시 닦아냅니다. 이 과정을 활대가 중력의 힘만으로 부드럽게 툭 떨어질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합니다.
4단계: 잔여 세척제 건조 및 무급유 유지 세척이 끝나면 헤어드라이어의 찬바람이나 에어스프레이를 이용해 잔여 세척제를 완전히 날려줍니다. 틈새가 뽀송뽀송하게 마른 것을 확인했다면 작업이 완료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기에 추가로 윤활유(미싱오일 등)를 바르지 마세요. 먼지가 없는 마른 금속 상태가 타자기 구동에 가장 완벽한 상태입니다.
3줄 핵심 요약
타자기 글자가 뭉개져 찍히는 것은 활자 홈에 잉크와 먼지가 굳어 박혔기 때문이며, 활대가 뻑뻑한 것은 내부 찌든 유분 때문입니다.
WD-40 같은 방청윤활제는 먼지를 끌어당겨 기계를 완전히 굳게 만들므로 절대 금지하며, 휘발성이 높고 안전한 '라이터 기름'을 세척제로 사용해야 합니다.
칫솔과 이쑤시개로 활자 머리의 이물질을 파내고, 세그먼트 슬롯에 라이터 기름을 흘려 찌든 때를 녹여 닦아내는 것만으로도 새것 같은 타격감을 복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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